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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혈액 검사로 특정 암을 초기 단계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암 조기발견이 더욱 손쉬워질 것이다. 내시경이 입이나 항문으로 들어가는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된다. 맘모그램이나 CT처럼 불필요한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아도 된다.
가령 위암을 보자. 지금은 40세 이상은 누구나 최소 2년에 한번 내시경을 받도록 권유한다. 국가암정보센터가 밝힌 우리나라 위암 발생률은 10만명당 55.3명이다. 이중 40세 이상 인구를 절반으로 보면 5만명당 55.3명이며 이것은 0.1%의 확률에 해당한다. 1,000명이 내시경을 받는다면 1명에게 위암이 발견되고, 나머지 999명은 정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0.1%의 확률에 내가 포함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연례행사처럼 한평생 내시경을 받는다.
그러나 혈액검사로 암 진단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시경이 필요하다해도 혈액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된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시행하면 된다. 전세계 과학자들이 혈액검사를 통한 암 검진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
되고 있다. 덩어리 단계에서나 확인 가능하던 암을 세포 단계 혹은 분자 단계에서 찾아내는 연구다. 대덕 연구단지에 위치한 바이오벤처 지노믹트리의 안성환 대표를 만났다.
성균관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안대표는 91년 도미,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스탠포드대에서 박사 후 과정을 했다. 마이크로 어레이 등 DNA칩 연구를 기반으로 암 진단키트 개발에 도전하기 위해 2001년 지노믹트리를 세웠다. 지노믹트리란 유전자들의 나무란 뜻. 그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고정불변의 DNA 염기서열의 변형없이 후천적 습관이나 환경에 의해 해당 유전자 발현이 달라질 수 있는 게 후성 유전”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이 필요한 산물을 만들어 내야 할 때 조절 기능은 단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태어날 때 결정된 유전자의 염기서열 만으로 작동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후성유전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기능 중 가장 기본적 메커니즘중의 하나가 메틸기(-CH3)가 유전자 조절부위DNA의 시토신 염기에 달라붙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유전자가 갖고 있던 고유의 활동 기능이 정지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마치 전기불의 스위치를 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도 나쁜 습관과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면 메틸기가 달라붙을 수 있고 결국 유전자 고유의 기능을 잃게 된다. 반대의 설명도 가능하다. 나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도 좋은 습관과 행동이 유지되면 나쁜 유전자의 작동이 정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후성유전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타고난 유전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영양이다. 여왕벌을 보자. 벌집에서 바글거리는 애벌레들은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유모벌이 갖다 주는 먹이의 성질에 따라 어떤 애벌레는 일벌이 되고 어떤 애벌레는 여왕벌이 된다.
과거 오랫동안 로얄젤리가 여왕벌을 만드는 마법의 먹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지금은 로얄젤리 보다 훨씬 복잡한 영양성분이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요한 메시지는 그 성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차별화된 먹이가 여왕벌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왕벌은 생식기능이 유지되며 덩치가 커지고 수명도 길어진다. 유전자는 같지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 셈이다.
2차 세계대전 혹독한 기근에 시달렸던 네덜란드에서 당뇨나 심장병 등 질환이 많이 발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한다. 어머니의 영양결핍이 자궁 속 아기의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각종 질병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후성유전이 생식세포의 변화를 통해 그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의 습관이나 환경이 손자 세대의 유전자에까지 대물림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후성유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양만 있는 게 아니다. 담배 등 유해물질은 물론 심지어 극심한 스트레스도 포함된다.
2015년 미국 마운트사이나이병원 연구진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유전자 자체가 달라져 있음을 확인했다. 부모세대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에 취약하도록 유전자의 변화를 일으켰고 이것이 후성유전을 통해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었다는 것이다.
안대표가 십 수년 동안 주목해온 것은 특정암을 지칭해 줄 수 있는 비정상적인 유전자메틸화 현상이었다.
그의 연구팀은 통합 유전체학적 기법을 활용한 중개연구를 통해 8번 염색체의 신데칸-2(Syndecan-2) 유전자의 비정상적 메틸화가 대장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새롭게 발견했다. 신데칸-2 유전자는 종양을 억제하는 기능을 갖는 유전자로 추정 하고 있다. 불에 탄 고기 등 무엇인가 대장에 나쁜 식습관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이 유전자 부위에 메틸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종양억제 기능을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암이 발생하는 경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인과관계는 향후 좀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들이 조사한 대부분의 대장암 조직과 심지어 아주 작은 용종조직에서도 비정상적인 신데칸-2 유전자 메틸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모든 정상조직에서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메틸화를 관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비정상적인 신데칸-2 유전자 메틸화가 대장암 조기 진단용 분자 바이오마커로 활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설명이다.
일차적인 측정대상 샘플은 액체시료(Liquid biopsy) 인 혈액이었다. 최근 액체시료를 활용한 체외 암분자 진단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지노믹트리 연구진은 오래 전부터 제대로 된 목표와 방향으로 경주해온 셈이다.
평상시 수명을 다한 세포들은 터지면서 조각난 DNA들이 혈액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를 혈액 속에 순환하고 있는 세포유리DNA(Circulating Cell-free DNA)라 한다. 암세포도 같은 경로를 겪게 되고 결국 암환자의 혈액 속에는 정상 세포와 암세포로부터 유래된 두 가지 종류의 세포유리 DNA가 섞여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암세포 유래 DNA비율이 정상에 비해 너무 적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짚 더미 속에서 바늘 찾기란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현재 지노믹트리 기술로 암세포의 유리 DNA가 0.1%만 있어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대장암 환자의 혈액에서 0.1%로 숨어있는 암세포의 유리 DNA를 찾아낸다. 이때 사용되는 지표가 신데칸2 유전자의 메틸화다. 지금으로써는 혈액에서 적혈구 등을 제거한 혈장 또는 혈청 1cc정도면 믿을만한 측정이 가능하다.
DNA를 추출하고 메틸화 검사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정량적 유전자 증폭방법인 LTE-qMSP 어세이를 적용하여 신데칸-2 유전자의 메틸화 정도를 산출한다. 대장암 덩어리가 커질수록 메틸화 정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한국 식약처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에서 대장암 환자의 87% 이상에서 병기에 상관없이 양성이며, 특히 대장암 1기 환자에서는 92%의 양성을 나타냈으며 대장암 진단에 대한 정확도가 9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대장암의 전단계인1cm 이상의 용종에서도 약 60% 정도 양성을 나타냈다.
혈액을 통한 지노믹트리의 대장암 진단기법은 2013년 분자진단학회지(Journal of Molecular Diagnostics)에 발표되고 미국 CNN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 식약처로부터 2등급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다.
최근 안대표는 혈액뿐 아니라 대변을 샘플로 한 검사법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장암의 경우 혈액보다 대변에서 훨씬 많은 양의 암세포 유리 DNA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변에선 혈액보다 유리 DNA가 10배나 많다. 따라서 혈액에선 0.1%가 있어야 찾아낼 수 있지만 대변에선 1%만 있어도 검출이 가능하다. 1그램의 대변만 있어도 된다. 게다가 대변은 혈액보다 특이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결정적 장점이 있다. 혈액엔 우리 몸 전체 세포들에서 유래한 DNA 조각들이 섞여 있으나 대변엔 대장점막의 세포들의 유리 DNA만 존재한다. 현재 대변을 이용한 탐색적 임상연구에서 대장암을 각각 90%의 민감도와 특이도로 진단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고, 1 cm이하의 작은 용종도 40% 정도 진단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국 식약처 허가를 위한 대규모 임상시험을 계획하고 있다.
외국에선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미국의 바이오벤처 Exact Science사는 대변만을 대상으로 대장암 검진키트를 만들었고 독일의 바이오벤처 Epigenomics는 혈액만을 대상으로 대장암 키트를 만들었다. 두 회사 모두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Exact Sciences사의 분변검사는 비용이 비싸고, 검사과정이 복잡하며, 가격 대비 위양성률이 높으며, Epigenomics사의 혈액검사 제품은 많은 양의 혈액을 사용하고 민감도 및 특이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
안대표는 신데칸2 메틸화를 기반으로한 자신의 방식이 대장암 진단에 대한 임상적 성능인 민감도와 특이도는 물론 검사 비용에서도 이들 외국제품보다 낫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임상시험을 위해선 200억원 가까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미국보다 우리나라에서 승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식약처 허가와 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 등재를 위해 논문과 임상 데이터를 보강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신의료기술로 등재되면 합법적으로 병의원에서 검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혈액이든 대변이든 내시경을 하지 않고 대장암을 미리 찾아낼 수 있다면 획기적 기술임에 분명하다. 대장내시경의 불편함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날 관장을 통해 장을 비워야하는 불편함과 내시경이 항문으로 들어가는 부끄러움이 있고 드물지만 장 천공 등의 부작용이 있다. 실제 우리나라 대장암 발생률이 전세계 1위 임에도 검진대상 연령의 70%가 대장 내시경검사를 받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혈액이나 대변을 이용한 대장암 검진의 과제도 있다. 무엇보다 종양의 크기가 아주 작을 경우 혈액이나 대변으로 떨어져 나오는 유리 DNA 양이 작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검출하기 위해서는 고감도 검출기술의 사용과 검사횟수 및 검진간격을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암 검진의 주된 목적은 암이 작을 때 일찍 발견해서 제거해 유병률을 낮추고 생존율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의 크기가 이미 커질대로 커진 암은 발견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치료를 해도 생존율을 높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대표 역시 자신의 비침습적 체외 분자진단 방식이 정확도 면에서 의사가 눈으로 종양을 확인하는 기존 대장 내시경과 경쟁하는 구도는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는 법. 혈액이든 대변이든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개발된 진단기술을 통해 간편하게 대장암을 진단해낼 수 있는 기법이 임상시험을 거쳐 상용화되어 전세계 인구를 대상으로 확산될 수 있길 기원해본다.